우리 고장이 낳은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관 건립 상량식 및 안전 기원제가 지난 8월 30일 진천읍 산척리 기념관 건축현장에서 열렸다.
기념관은 지난 2016년 국가현충시설 건립대상사업에서 선정된 이후 사업자 변경, 설계변경 등 진통 끝에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상량식을 통하여 내년 6월에 준공될 예정이다.
보재기념관은 연면적 4,560평, 부지면적 2,840평에 여러 부속건물을 포함한 총사업비 7,591백만원(국비 1,800,도비 1,031,군비 3,995 자담 765)의 우리지역의 대표적 역사문화사업이다.
일제 침략기에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선구자이신 보재 이상설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선생의 유훈을 계승하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애국애족 정신을 고양하고자 함이 바로 보재 이상설선생기념관 건립의 취지일 것이다.
이에 상량식 상량문 원문을 통하여 보재 선생의 숭고한 독립운동의 유지를 다시금 되새겨 본다.
보재 이상설선생기념관 상량문복장기(上樑文腹藏記)
단군기원(檀君紀元) 4354 임인년(四三五四 壬寅年) 음력(陰歷) 8월(八月) 30일(三十日) 사시(巳時)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정통령(正統領)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先生) 추모기념관(追慕紀念館) 상량식(上梁式) 상량문복장기(上樑文腹藏記)
보재 이상설 선생께서는 서기(西期) 1870년 음력(陰曆) 12월 7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태어나시어 평생 조국광복을 위하여 사시다가 1917년 음력 3월 2일 48세로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운명하시다.
선생께서는 아버지 이행우(李行雨)와 어머니 벽진 이씨의 두 아들 중 장남(長男)으로 태어나셨으니, 본관(本貫)은 경주(慶州), 아명(兒名)은 복남(福男), 자(字)는 순오(舜五), 호(號)는 보재(溥齋),당호(堂號)는 벽로방(碧蘆舫), 동기(同基)로는 11살 아래 상익(相益)이 있다.
가계(家係)는 고려 충선왕 대학자(大學者)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22대손, 조선 선조 영의정(領議政) 이시발(李時發) 의 11대손이시다.
7세 때 동부승지 이용우(李龍雨)의 양자로 출가하여 1894년 25세에 조선의 마지막 과거의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제수된 후 성균관 교수, 의정부 참찬, 탁지부재무관의 벼슬을 거쳐 약관 27세에 성균관 관장(成均館 館長)이 되셨으며, 최초의 근대 수학교서 산술신서(算術新書)발간하시어 한국 근대 수학의 아버지라 불리었다.
선생을 칭하여 “문장은 경교(鯨鮫)를 거꾸러뜨릴 만 하고 성리학(性理學)은 그 근굴(根窟)을 뚫었도다. 깊은 생각은 역학(歷學)과 수학(數學)에 궁달(窮達)하고 정치와 법률에 정통(正通)하였다. 의학(醫學),역사(歷史),지리(地理)는 더욱 연구가 깊도다.” 라고 극찬(極讚)하였다.
1904년 일제침략에 저항하는 황무지 개척권 반대상소문을 올리시며,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조직하여 항일구국운동 전개하시었다.
을사늑약 파기 상소문에 선생은 을사늑약조약으로 인하여 어차피 나라는 망할 것이니 황제는 사직(社稷)과 같이 순사(殉死)하기로 결심하고 5적(五敵)을 죽이고 조약을 파기하라고 외쳤으니, 이를 지켜본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우린들 누가 붉은 피가 없으랴
오호 나라 망한 슬픔이여
형제자매들아 내말을 들어보라
사생 간에 나라 망하는 것은 슬프고 사생 간에 가슴에 피가 끓어오른다.
말과 울음이 서로 섞이고,
땅바닥에 뒹구니 흙이 머리카락에 가득하구나
땅바닥에 뒹굴지 말라고 이르지 말라
나는 이 흙과 같이 죽으려는 것이니
1906년 8월 북간도 용정에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 서전서숙(瑞甸書塾)설립하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제2회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위임되어 이준, 이위종 부사(副使)와 함께 정사(正使)로 파견되어 애국 계몽사상,항일 독립사상, 민족주체사상의 근간인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를 주창하시었다.
1910년 십삼도의군 창설을 주도 유인석을 도총재로 추대, 블라디보스톡 성명회 선언, 1911년 권업회(勸業會)창설하시고, 1914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 임시정부 정통령이 되셨다. 1915년에 신규식, 박은식과 더불어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여, 광복군의 무장과 독립전쟁 추진의 방략을 결의하였다.
1917년 하바로프스크 은둔 및 투병생활 중 다음과 같은 삼읍(三泣)시를 읊었다.
“나라를 잃어 나라를 울고 집을 떠나 집을 울고 이제 몸 둘 곳조차 잃어 몸을 우노라(泣國泣家又泣己). 아! 선생님이시여! 조국을 언제 떠나셨습니까!
고향을 묻지 마라! 이 몸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사라지노니 부끄럽고 애통하여 나라가 울고 집이 울고, 내가 우노라!
그리운 고향산천 가슴에 묻고 나는 지금 차디찬 이국의 땅에 잠드노니.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갈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며 임종 하셨다.
아! 보재 선생님이시여!
까마득한 고향의 후학들 오늘 선생님 추모 기념관 상량식에 들국화 한 송이 바치오니 부디 기쁘게 받아 주시옵소서.
조국 독립의 요람 서전서숙은 고향땅에 서전중·고등학교로 다시 태어났고, 그리운 고향 들녘에 세워지는 보재 이상설 기념관은 선생님의 거룩한 독립의 유지 받들어 백년대계 천추만대 대한민국 독립의 요람으로 탄생될 것을 삼가 고하노니 부디 기뻐하여 주소서.
백년 전 외로운 유혼이 떠돌던 우수리스크 강가에서 돌아오시어 매년 사계절 꽃이 피는 어릴 적 뛰놀던 진천 고향하늘 아래 평안히 영면 하시옵소서.
이에 오늘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관 상량문을 지어 올리나이다.
서기 2022년 8월 30일
보재이상설기념관건립추진위원장 진천문화원장 장주식
진천군수 송기섭, 진천군의회 의장 장동현
현장 대리인 함승해, 감독관 구부섭, 감리단 이석범
문화재 보수기술자 홍성호, 도편수 김달경
글 남구현, 글씨 김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