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로부터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경축하고 독립 정신의 계승을 다짐하기 위해 1949년 제정된 국경일이 광복절이다.
이 날은 독립을 기념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되새기고 다시는 이러한 식민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결의를 다지는 날이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조들의 희생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음지에서 양지에서 한국인 못지않게 대한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방인들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① 호머 헐버트는 적극적으로 조선의 자주 독립운동을 지원하였고,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활동도 적극 지원하여 일본의 갖은 방해공작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만국평화회의에서 서방에 일본의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조선의 주권 회복의 필요성을 알렸다.
그는 1905년 고종의 뜻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는 등 외교와 언론, 국제여론 형성 등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또한 ‘사민필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를 펴냈고 한글 표기할 때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를 최초로 도입한 한글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연구소를 개설해 현대 한글 정립에 주시경 선생 못지않은 공을 세웠다.
이런 공로로 2014년 한글날에 금관문화훈장을 받았고 1950년에는 외국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그는 미국의 교육자이자 언론인, 한국학 연구자였고 후에 기독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는 웨스트 민스터 사원보다도 한국의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유언을 남겼고, 1949년 8월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영면하였다.
② 어니스트 베델은 1904년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통신원 자격으로 조선에 입국하였고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자 일제가 압력을 넣기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 영국과 일본이 동맹국 국민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신문사를 치외법권으로 주장하며 일제의 만행을 적극적으로 고발했다. 일제는 영국정부에 압력을 넣고 그를 고소하였다. 그는 재판을 위해 영국으로 갔다가 1909년 다시 조선에 돌아와 재판과정 중 건강을 잃어 37세 나이로 요절하였다.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신문사 운영에 전재산을 쏟아 붓는 바람에 정작 가족들은 정부 보조금으로 살 만큼 궁핍했다. 베델은 유언으로 “나는 죽지만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게 하시오” 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베델 사후에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꾸고 일제의 기관지가 되었다가 광복후에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③ 일본인 후세 다쓰지는 일본의 식민지 침탈 논리에 회의를 느꼈고 검사시절 사법정의의 한계를 절감하고 인권 변호사의 길로 가게 된다. 1911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로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다가 일본제국 경찰에 요주의 인물이 된다. 그는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조선 건국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하는 등 평생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하였고 2004년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의 묘비명에는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라고 적혀있다.
④ 프랭크 스코필드는 교수이자 기독교 장로교 선교사로 일제 만행에 충격을 받아 이를 세계에 알리고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였다. 3.1운동을 취재하여 서방에 알리고 제암리 학살 사건을 취재, 자세한 보고서로 전세계에 알렸다.
그는 ‘스코필드 기금’을 만들어 수많은 고아와 학생들을 도왔고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다. 그는 1958년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서울대학교 수의학과에서 교편을 잡았고 평생을 한국 사랑에 몸바쳤다.